담당 공무원조차 ‘번역가죠?’
수출 제품 외국어 매뉴얼 작성하는 전문가…일의 중요성에 비해 보수 낮은 편
테크니컬 라이터를 아시나요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 ter)’라는 명함을 내미는 사람과 만난다면 누구나 십중팔구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선 아직 명확한 직업 분류가 돼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해외로 수출하는 상품의 사용 설명서, 즉 매뉴얼을 외국 언어(주로 영어)로 제작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최근 한국의 휴대전화나 TV, 반도체, 소프트웨어 등 정보기술(IT) 제품의 수출 비중은 자꾸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제품에 동반되는 영문 혹은 다국적 언어로 작성된 매뉴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는 제품 매뉴얼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조차 테크니컬 라이터에 대해선 잘 모르는 듯하다. 어떤 공무원은 “번역가를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실제로 통계청 통계정책과의 직업 분류에 의하면 1414개의 직업군 가운데 테크니컬 라이터는 번역가로 분류된다. 담당 사무관은 “아직은 테크니컬 라이터들의 독립성이 약하고 종사자 수가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번역가로 분류되는 것은 국문 테크니컬 라이터들이나 제품 개발자가 만들어놓은 제품 설명서를 ‘번역’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단순 번역으로는 문화적 차이를 배려하기 힘들다고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말한다. 한국이나 일본 소비자들은 매뉴얼의 디자인을 중시한다. 반면 미국 소비자들은 논리를 우선시한다. 또 유럽 소비자들은 Q&A 형식으로 된 매뉴얼을 선호한다. 국가에 따라 눈높이도 달라진다. 같은 제품도 우리나라는 고졸 주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매뉴얼을 작성하는 반면, 미국은 중졸 주부를 대상으로 쓴다. 대부분의 경우 쉽고, 간결한 언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 제품 사용서의 요건 중 하나다. 보통 글쓰기에서는 동어 반복을 피하지만 매뉴얼은 용어의 통일이 중요하다. IT 제품 설명서 제작업체 테스코의 김홍균 이사는 “제대로 된 매뉴얼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제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사용자 입장에서 제품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개발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찾아내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국내 전문 기업은 10여 개뿐 현재 테크니컬 라이터들이 상주해 매뉴얼을 작성하고 디자인, 편집까지 전담하는 기업은 국내에 10여 개 정도다. 대부분 삼성전자나 LG전자에서 분사한 아웃소싱 업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안철수연구소, 소규모 IT 벤처기업들도 몇몇 테크니컬 라이터를 고용하고 있다. 해외로 나가는 제품 매뉴얼을 자체 인력과 조직으로 작성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한국TC(Technical Communications)협회의 장석진 사무국장은 “국내 대기업의 IT 제품의 경우 99%가 아웃소싱에 의존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경우 영어를 잘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쓰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한다. “요즘 세상에 영어는 누구나 다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품질이라는 생각을 안 해요. 기업들이 하청을 주다 보니 품질을 보장할 만한 근거도 없습니다.” 질이 떨어지는 매뉴얼 때문에 해외 시장에서 분쟁을 일으켰거나 손해를 입은 업체가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외국 소비자들은 매뉴얼도 제품의 일부라는 인식이 강하다. 인터넷 리뷰 사이트에서 제품 매뉴얼 품질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경우도 있다. 웹 에디터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세중나모의 오영주 테크니컬 라이터는 “제품은 좋지만 매뉴얼이 별로라는 소문이 퍼지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국내에선 2002년 제조물 책임법이 시행되면서 제품으로 인한 신체 및 재산상 손해에 대한 책임을 제조사가 지게 됐다. 이에 따라 미약하나마 업체들 사이에서 매뉴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삼성전자는 사내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영문 매뉴얼 스타일 가이드를 제작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의 해외 마케팅 담당자에 따르면 몇몇 고위급 임원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한글 매뉴얼 스타일을 통일한 지 3년이 지나고서야 영문 매뉴얼 정리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제품군의 매뉴얼이 서로 다른 아웃소싱 업체에 맡겨지고 있다. 물론 삼성이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관련된 매뉴얼은 자체 제작한다. 정보통신 총괄 네트워크 사업부에서 신입사원들에게 테크니컬 라이팅 교육을 담당하는 김경화 과장은 최근 몇 년간 사내 매뉴얼 담당 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사업부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실패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내부엔 ‘테크니컬 라이터’라는 공식 직함을 지닌 직원이 없다. 다만 외주업체가 작성한 매뉴얼을 검증하는 인력만 존재한다. LG전자의 경우는 지난해 벤처 기업 등에서 10여 명의 테크니컬 라이터를 영입했다. 이들은 기술개발연구소에서 개발자용 매뉴얼을 작성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비자 제품 매뉴얼의 경우는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아웃소싱 업체에 맡기고 있다. 이런 환경에선 테크니컬 라이터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렵다. “테크니컬 라이터에 대한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제조업자는 영문 매뉴얼을 번역 작업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단어 수로 정산될 뿐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부가가치는 무시됩니다.”(테스코의 김홍균 이사) SK텔레콤 협력업체 엔텔스의 배선종 팀장은 테크니컬 라이터에 대한 기업들의 대우를 이렇게 설명한다. “벤처 기업은 연봉은 좀 많이 주는 편이지만 불안정하고, 대기업은 안정성을 보장하지만 연봉은 한참 떨어집니다. 테크니컬 라이터에게 제대로 된 연봉을 지급하는 회사는 거의 전무합니다.”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금전적 처우도 문제지만 커리어상의 한계를 커다란 장벽으로 꼽는다. 배 팀장은 엔텔스에서 영문 테크니컬 라이터로 일하다 최근 사내 글로벌 서비스팀으로 옮겨 해외 프로젝트 담당자로 직종을 바꿨다. 그에 따르면 테크니컬 라이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리가 팀장이라고 한다. 테크니컬 라이터들의 업무 내용이 광범위해 언어 이외의 전문성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에 회사에서 임원급으로 승진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35살 넘으면 이직도 어려워 게다가 35세 이후에 영문 테크니컬 라이터가 다른 직업으로 이직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젊은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수시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옮겨다니게 된다. 이에 따라 업계의 인력 수급 불균형은 고질적인 문제가 돼버렸다.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의 부재도 문제로 삼는다. 미국의 경우 많은 대학이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technical communication)’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학사, 석사뿐 아니라 박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전문영어(professional writing and technical communication)’라는 이름으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개설한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가 유일하다. 뉴욕 주립대(SUNY)에서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 과정 석사 학위를 받아 국내에서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라성일 강사는 국내 현실을 이렇게 지적한다. “독자적인 비전이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테크니컬 라이팅 업무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공식적인 교육 기관이 모자라 사내의 도제식 교육에 의존하다 보니 실무 종사자를 위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는 정부나 기업 모두 테크니컬 라이팅 산업이 갖는 사회적 부가가치에 대한 인식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양숙 사장 인터뷰 |
“불친절한 매뉴얼은 제품 신뢰 떨어뜨려요”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원칙적으로 주 5일제로 근무하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쉬도록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지만 우수한 인력에 많지 않은 급료를 주면서 헌신을 요구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이 듭니다.” 한샘 이지유저가이드의 김양숙 사장은 국내 테크니컬 라이팅 산업의 단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회사는 주로 삼성전자 휴대전화의 한글, 영어 및 다국적 언어 매뉴얼을 제작하는 곳이다.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지니고 전자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력을 항상 찾고 있지만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영어를 잘하는 우수 인력들은 더 쉽고, 안정적인 직종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사장은 고민 끝에 2년 전에 영문 테크니컬 라이터들의 초임 연봉을 3000만원으로 책정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을 선호하는 현실 속에서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이려면 임금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업체들이 훨씬 적은 급료를 주는 상황에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나서서 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죠.” 현실적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임금 인상은 매뉴얼 제작 비용을 높여, 제품 자체의 단가 인상으로 이어진다. 김 사장은 제품의 단가가 높아진다 싶으면 제조회사들이 가장 먼저 매뉴얼 제작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삼성전자는 약 300쪽에 달하던 휴대전화 매뉴얼을 갑자기 100쪽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쪽수가 3분의 1로 줄면 인쇄, 물류 비용이 그만큼 절감된다는 것이다. 일부 저가폰의 경우 A3 용지 한 장으로 매뉴얼을 대신하기도 한다. 김 사장은 매뉴얼을 소비자와 제조사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본다. 따라서 ‘불친절한’ 매뉴얼은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제조사에 여러 번 강조했지만 비용 절감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김 사장은 소비자들이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제품을 구입했다면 수많은 기능을 충분히 이용하겠다는 의식을 갖고 불편한 제품 설명에 대해서는 제조사에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