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산이론

"기계로 측정할 순 없지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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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로 측정할 순 없지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글솬이 2021. 12. 1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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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측정 결과와 개인의 경험이 다를 때 많은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그러니 인간의 경험을 무시하고 과학만 맹신하는 건 잘못된 태도라는 거죠.

저 역시 현대 과학으로 아직 해명하지 못한 수많은 현상들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아직 해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영역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소리와 같은 물리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입니다.
공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라면 우린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되죠.

그러니까 인간이 고막을 통해서 소리의 진동을 느끼든, 광대뼈나 두개골을 통해서 느끼든, 공기의 진동을 느낀다는 점에선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기의 진동은 인간보다 기계가 훨씬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맑은 날 음악을 들었을 때와 비오는 날 음악을 들으면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데 이것을 기계로 측정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물론 날씨에 따른 개개인의 감성은 기계로 수치화할 수 없죠.
하지만 실제 공기의 진동인 소리를 측정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인간보다 기계가 훨씬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온도, 습도, 기압의 변화에 따른 소리의 미세한 속도 차이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죠.

물리적인 변화를 측정함에 있어서 인간이 기계보다 더 뛰어날 여지는 안타깝게도 전혀, 조금도, 단 1그람도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측정장비의 정밀도는 인간이 가진 감각기관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지 오래입니다.
인간이 기계에게 지는 것 같아서 섭섭하고, 뭔가 그래도 인간이 기계보다 더 뛰어난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 기대하는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섭섭하다고 해서 명백한 사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눈이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더 먼 우주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섭섭하게 여기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귀가 진동 측정용 레이저나 마이크, 오실로스코프보다 부정확하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감각기관의 정밀도를 가지고 기계와 경쟁하겠다고 하면 인간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착시 사진에 속고, 같은 냄새를 오래 맡으면 그 냄새에 둔감해지기 때문에 자신의 체취를 잘 느끼지 못하며, DP회원들의 연배쯤 되면 12kHz 이상의 고음은 대부분 듣지도 못합니다.

그런 부실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 엄청나게 정밀한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적어도 아직까진 인공지능으로도 구현하지 못하고 있죠.

문제는, 그 상상력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지할 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인간이 착시 사진에 속는 것도 시각으로 들어온 정보 속에서 그 정보에 담긴 것 이상을 추측하고 상상하기 때문이죠.
아래 착시 동영상은 그런 인간의 상상력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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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평행한 두 쌍의 직선이 각각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 일부를 가려버리면 인간은 이것을 정사각형이 움직이고 있다고 인지하게 됩니다.
인간의 두뇌가 가려진 부분을 상상하고 추측하기 때문이죠.

또한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 역시 인간의 인지능력에 영향을 미치죠.
같은 곡을 들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 한 잔 하면서 들을 때는 감미롭게 들리지만 마감에 쫓기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곡은 소음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바뀐 것은 자신의 컨디션이고 감정이지 음악이 바뀐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감정을 통해 소리의 차이를 느낍니다.
바로 비싼 가격표가 붙은 물건에 대한 기대감과 그 물건의 '뽀대'가 주는 만족감입니다.

대충 구겨진 검은 비닐봉투에 넣어 건네받은 선물과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아 실크 리본을 묶어 준 선물, 어느 쪽이 더 가치있게 느껴지던가요?
당연히 후자의 선물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느끼겠죠.
내용물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감싼 포장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린 내용물의 가치가 다른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돈다발을 가득 준다면 라면박스에 담아서 줘도 땡큐지만요.


이런 '포장'에 의해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게 되는 경험입니다.

마찬가지로, 변변한 포장도 없이 판매되는 싸구려 회색 랜 케이블과 메쉬로 감싼 굵은 케이블에 금도금된 고급스러운 단자를 뽐내는, 한눈에 봐도 '나고급'이라고 느껴지는 랜 케이블을 봤을 때 우리가 후자의 제품에 더 신뢰감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거기다 케이블에 배터리 전원팩까지 장착되어 있고 그것으로 유전체를 바이어스시켜서 주파수와 에너지 레벨마다 다른 시간 지연이 발생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외계인을 고문해서 탈취한 엄청난 기술이 들어간 것 같은 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신뢰감은 더더욱 치솟게 됩니다.
이쯤되면 비닐봉투에 담긴 싸구려 랜 케이블 따위로 음악을 들으면 엄청난 노이즈가 유입되고 원본과 전혀 다른 왜곡된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당연한 겁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상상하고 또 감정에 영향을 받으니까요.
오죽하면 1400여 년 전에 이미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의 일화가 아직까지 회자되겠습니까.

하지만, 랜 케이블로 인해 소리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는 계측되지 않습니다.

다시 이 글의 원점으로 돌아와, 어떤 측정장비로도 소리의 차이를 측정할 수 없는데도 누군가는 랜 케이블을 바꿨더니 음질이 좋아졌다고 느낍니다.
랜 케이블로 흐르는 전류의 양은 너무 미약해서 CAT6 규격의 랜 케이블 정도면 차폐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설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선 당연한 겁니다.
누가 뭐라든 분명 소리가 변한 걸 느꼈으니까요.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감각기관보다 훨씬 정밀한 측정장비조차 그분들이 들은 차이를 측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좋다는 랜 케이블을 만든 제조사들조차도 자신들이 판매하는 케이블로 인해 음질이 어떤 형태로 얼마나 좋아졌는지 측정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저 느낌적인 느낌으로 좋아졌을 거라는 것 외엔 음질 향상이 이뤄졌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 거죠.

여기까지만 읽었는데도 벌써 불쾌함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남들이 뭐라든 나는 차이를 느꼈는데 누군가 그걸 착각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그런데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사진 속 큐브 같은 것을 보면 위쪽이 회색이고 아래쪽이 흰색으로 보이실 겁니다.
그런데 그 경계면을 한 번 손가락으로 가려보세요.

......신기하죠?
분명히 회색과 흰색으로 각각 전혀 다른 색이라고 봤는데 실제론 동일한 색이라니.
말그대로 멀쩡히 눈 뜨고 속은 느낌이실 겁니다.

심지어 이미 저 두 개의 면이 서로 같은 색이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된 상태에서도 경계를 가린 손가락을 떼면 또 다시 회색과 흰색으로 보이게 되죠.

여러분은 이런 착시현상을 경험하면 불쾌하신가요?
아닐 겁니다.
자신이 신뢰해왔던 경험(감각)이란 것이 실제론 굉장히 부정확하다는 걸 알게된 게 신기할 뿐 불쾌하게 여길 분은 없으시겠죠.

인간의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는 건 공기의 진동만을 느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컨디션과 상상력과 감정이 관여한 결과물을 '들었다'고 느끼는 겁니다.
고막으로 감지한 공기의 진동 + 두뇌의 후보정 효과가 가미된 최종 결과물을 실제 소리라고 착각하는 거죠.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다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을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두뇌가 가공한 후보정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게 이미 다양한 실험과 관측의 결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전 랜 케이블에 따라 음질의 차이를 느꼈다는 분들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차이를 느끼셨겠죠.

하지만 그건 실제 공기의 진동에 차이가 생긴 게 아니라 그분들의 뇌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앞에서 보여드린 착시 사진과 전혀 다를 것 없이 말이죠.
이것을 부정한다면 바로 위에서 경험하셨던 착시 현상도 부정해야 합니다.

"내 눈(두뇌)은 착시를 일으키지만 내 귀는 그런 환청을 듣지 않는다!"고 항변할 분들도 계시겠죠.
하지만 현실에선 수많은 실험결과를 통해 약물이든 전기자극이든 감정 상태든 컨디션이든, 인간은 여러 변수에 따라 아주 흔하게 실제 소리를 왜곡해서 듣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환청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초자연적인 '소리'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두뇌 속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상상력'의 결과물인 겁니다.

인간의 감각기관이 물리적인 변화 그 이상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때부터는 종교의 영역이 됩니다.
적어도 인간이 만든 기계인 오디오는 그런 초자연적인 무엇인가를 방출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있죠.
오디오란 취미가 과학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기만족으로 하는 건데 랜 케이블의 차이를 느꼈다는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겠냐는 겁니다.

실제 소리에 차이가 있든 플라시보 효과든, 어쨌든 본인이 차이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오디오 생활하는 사람한테 구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불만이시겠죠.
그런데 다른 댓글에서도 썼던 내용입니다만 이러한 오디오계의 미신은 이 취미에 입문하는 사람들까지 끌여들여 새로운 피해자를 끊임없이 양산하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과거에 저 역시 그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고요.

그나마도 위에 보여드린 착시 사진처럼 고가의 랜 케이블이 일관되게 음질의 차이를 들려주기라도 한다면 다행입니다.
설사 그것이 플라시보 효과라 할지라도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론 누가 몰래 랜 케이블을 바꿔치기해도 여러분들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말에 분노한 수많은 동호인들이 자신은 랜 케이블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고 반박했지만 정작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 차이를 구별해내지 못했습니다.
단언하지만 수백만 원짜리 랜 케이블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제조사의 사장도 구별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랜 케이블에 따라 음질 차이가 있다는 분들은 이제 그 경험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블라인드 테스트조차 거부하고 있죠.

음악과 영화를 즐기는 DP회원분들에게 어울리도록 이 글의 마지막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