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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 끝의 시작

글솬이 2022. 3. 28. 14:46

서유미 <끝의 시작>, 민음사

 

끝과 시작혹은 그리고 시작 아닌, 끝의 시작이라는 제목에 끌렸다. 무언가 힘든 상황을 끝낸(극복한) 주인공들이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하는 흔한 내용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감에 책장을 넘겼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완벽한 끝을 맞이한 후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끝과 시작의 모호한 경계에서 다른 끝을 향해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 냈다.

 

전반적으로 슬픔과 서글픈 정서가 짙게 묻어 있는 글이지만, 작가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캐치하고, 이를 독자가 공감하기 쉽게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평범한 이야기 소재에 집중할 있는 , 공감이라는 측면이 극대화 되었기 때문이다.(취향 탓인지, 경험 탓인지 몇몇 대사는 내가 직접 말해본 같았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별, 이별, 이혼) 향해 살아가고 있다. 현실 속의 누구나 처럼,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환경들로 인해 어른이 현재까지 과거의 기억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끝을 극복하면서 성장하기 보다는 각자가 처한 상황 자체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지쳐서 어쩔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니깐, 살아내다 보면 희망 비슷한 무엇인가가 보일 수도 있는 삶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살아낸다. 베인 상처 위에 붙일 있는 밴드같은 작품이라는 작품 평처럼,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재생력을 통해 치유하기까지 상처를 가리면서 담담히 삶을 살아내는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위안이 된다. 이별, 상실, 공허.. 저마다의 끝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과 그들을 위로하듯 다시 시작되는 삶의 재생력, 하지만 회피하거나 당당히 맞서는 것도 아닌, 그냥 그렇게 살아내는 삶의 태도가 닿는 작품이다.


죽음을 잊고 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 몰라도 시선이 삶 쪽에 고정되어 있다는 건 축복일 것이다. -p32

문밖의 노크 소리에 응답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이 보내는 시간을 생애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충만하게 즐기는 것,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사랑 없이 건조하고 퍽퍽하게 사는 것 보다 뜨겁고 충만하게 사는 것, 그게 지금 여진이 바라는 삶의 방식이었다 -p89

살아 있고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바른 색은 지워질 것이고 다시 냄새가 날 테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른 색으로 칠하고 새로운 향수를 부린다. 그게 견디는 방법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견디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p103

그는 외로움 속에서 늘 누군가를 기다렸으나 막상 다른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어색해하며 혼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 안도하며 충분한 시간을 보낸 뒤에는 다시 누군가 다가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게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 패턴이었다. -p105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사랑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 모든 걸 사랑이라고 불러야겠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소정은 자신에게서 떠나간 것이, 자신이 잃은 것이 사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p137